1. 헬라어에서 침례주다 (밥티조)는 동사는 물에 담그다는 의미이다.
2. 성경에 나타난 경우에 보면 무두 침례를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3:23)에 나타난 침레요한의 경우에 보면, "요한도 예루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고 했다. 이 구절은 애논('샘'이라는 뜻)에는 물의 양이 많다는 의미인지(much water), 아니면 연못이나 호수 같은게 많다는 의미인지(many water)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느 경우라도 세례주의자들에게는 도움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주기 위해서는 물의 양이 많을 필요도 없고 호수나 연못이 많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한 바가지의 물만 있으면 수백명에게도 세례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8)에 나오는 내시의 경우는 어떤가? 그가 빌립의 구원상담으로 구원 받은 후 물있는데서 침례를 받았다. 한 나라의 재무장관이 먼 거리를 여행할 때에는 충분한 양의 물을 마차에 싣고 갔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을 정도의 물은 마차 안에충분히 있었을것인데 왜 굳이 "물 있는 곳"(사도행전8:36)으로 갔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마차에 있는 물로는 침례받기에 불충분하였기 때문이다.
3. 침례가 나타내는 의미는 세례나 다른 형태로는 표현 할 수 없다. 침례는 이전의 나는 죽고 예수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내적 신앙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 몇 방울로는 그 의미를 표현 할 수 없고, 실제로 몸 전체가 물에 잠겼다가 올라와야만 이 의미를 제대로 표현 할 수 있다.
4. 초대교회에서 모두 침례를 행했다. 그러다가 120년 경부터 변질된 교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디다케' (12사도 교훈집)는 120년경의 저작인데, 이 책에 보면 흐르는 물이 없을 경우에는 머리에 물을 세번 부음으써 침례를 해도 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3세기의 크프리안 (Cyprian)은 죄를 씻는 것은 물의 양이나 침례의 양식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Calvin)도 그의 역작 '기독교 강요'에서 침례가 옳고, 또 초대교회에서도 침례를 행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서도 그 형태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세례를 행하는 일부교회에서는 침례는 정식이고 세례는 약식이니 세례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 논리로 하자면 구원도 약식, 기도도 약식, 신앙생활도 내 편리할 대로 약식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게 아닌가? 침례는 번거롭고 세례는 간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관심은 번거로우냐 간편하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하는데 있는 것이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아무리 큰대가를 치루더라도 경시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시행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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