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신경이란?
일부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도 신경을 안 하면 이단이다 ”는 말을 한다.
이단을 규정할 때 사도신경 암송 유무로 결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위험하기도 하다. 그것은 이단이 아닌 교회를 이단으로 만들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이단인 교회를 정통으로 인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속은 흉측한 이단이면서 그것을 위장하기 위해서 형식만 갖추면 정통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기독교는 한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단에 대한 정의는 전 세계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라야만 된다. 차제에 이단에 관한 정의를 새롭게 정립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사도 신경이 이단의 기준이라면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이단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미국의 최대 교파인 침례교회는 물론, 성서 교회 (Bible Church--순수 독립 교회로서 교단 형성이 전혀 되어 있지 않으며, 미국 내에 수만 교회가 있음), 복음적 자유교회 (Evangelical Free Church of America--이 교단에 속한 유명한 신학대학원이 시카고에 있는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임) 등이 모두 사도 신경이나 주기도문을 예배 때마다 외지 않기 때문이다.
침례교 계통의 신학대학원들은 물론 필자가 졸업한 달라스신학대학원 (Dallas Theological Seminary)을 비롯하여, 탈보트신학대학원 (Talbot School of Theology), 그레이스신학대학원(Grace Theological Semi- nary) 같은 미국의 명문 신학대학원들도 다 사도 신경 같은 것은 전혀 중시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국의 보수적인 교회나 교파에서는 전혀 문제삼지 않거나 중시하지 않는 것을 한국에서만 유독 강조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도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사고를 버리고 세계화의 대열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이단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들과 조금만 다르면 이단이라고 정죄하여 다른 교회나 교파에 지대한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심지어는 어느 학자 (예, 칼빈)의 가르침에 근거해 이단 여부를 가리는 경우조차도 있다. 칼빈이 훌륭한 학자이고 개혁가이기는 하지만 그가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기준이라면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교파는 모두 이단이라고 정죄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기준은 마땅히 성경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단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이단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싶다.
둘째,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부인하거나 왜곡한다.
셋째,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인하고, 성경 외의 다른 것을 주장한다 (예, 몰몬경, 원리강론 등)
넷째, 이단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다. 이단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에게만 진리가 있고, 자기들에게 속해야만 구원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다른 교회나 교파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성도들이 자신이 속한교회를 자랑스러워하고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자부심이 너무 지나쳐서 진리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것은 이단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수법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어느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그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거나 그를 교주화한다. 우리의 교주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사도 신경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내용보다도 형식화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3. 사도 신경을 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도 신경은 성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신경은 12사도가 한 구절씩 쓴 것을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완전한 전설에 불과하고, 실상은 서서히 발달되어 천주교회가 지배하던 AD 700년경에 오늘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사도 신경의 초기 형태는 2세기말 (약170년경)에 나타났다. 침례받을 때나, 불신자들이 신앙에 관한 질문을 할 때 손쉽게 답변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단한 신앙고백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 때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러한 단순한 초기 형태에 한 구절씩 더해져서 점점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하데스 (또는 지옥)로 내려갔다” (이 구절은 우리말 사도 신경에는 없음)는 구절이나, “holy church” (sanctam ecclesiam; “거룩한 교회”)에 “catholic” (보편적이란 의미도 되고 천주교회란 의미도 됨)이란 수식어가 추가삽입된 것이라든지, “성도의 교통”(sanctorum communionem)이란 표현은 모두 천주교회가 지배하던 6-7세기에 더해진 내용들이다. 이 중에 특히 “성도의 교통”은 지금도 천주교회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교통으로 해석해 소위 천주교회의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특히 천주교회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천주교의 주도 하에의 여러 구절이 더해져 오늘의 형태가 된 사도 신경을 왜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반복해야 되는가? 그것이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일부 교회의 예배순서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성경에도 없는 것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반복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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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문제 성서침례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축도를 함으로 예배를 끝내지 않고, 대개 담임 목사나 성도 중 한 사람이 폐회 기도를 함으로 예배를 끝낸다. 그러면 왜 대부분의 교회에서 하는 축도를 성서침례교회에서는 하지 않느냐?
1. 일부교회에서 예배를 마칠 때마다 축도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할 때 “예배당 건축”을 “성전 건축”이라고 하는 과오를 범한다. 신약에서 “성전”이라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외에는 각 성도나 성도가 모인 것 그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이지 건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과 은혜를 혼동하고 있으며, 주일과 안식일을 혼동하고 있다.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사 제도와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모두 폐해졌는데 아직도 제사장이 있는 것같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축도는 신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만인 제사장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 (벧전 2:9)이기 때문에 목사에게만 축복권이 있다는 사고는 비성경적이다.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일은 모든 성도가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목사와 구약의 제사장은 동일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에게 구약의 제사장이 가졌던 축복권이나 저주권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오늘날 그것을 주장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 시대인 구약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오늘날은 목사만이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가 자기에게 맞지 않아 다른 교회로 옮기고 싶어도 “교회를 함부로 옮겨 주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목사의 저주 때문에 무서워서 교회를 옮기지 못하고 힘들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보았다. 목사에게 과연 그런 막강한 권한이 있는가? 누가 목사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했는가? 물론 교인들이 철새같이 교회를 마구 옮겨 다니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다. 한번 교회를 정할 때에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신중하게 정해야 하고, 일단 교회를 정했으면 그 교회에서 평생 동안 주님을 섬긴다는 각오로 섬기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세이다. 한 성도를 떠나보내는 것은 굉장히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러나 꼭 떠나보내야 된다면 목사와 좋은 관계를 가지면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한 성도에게 가장 좋은 교회는 그 성도가 마음 편하고 기쁘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교회일 것이다.
그렇기 목사에게 축도권을 주어 그를 성도들보다 특별히 격상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가 아니다. 목사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며 그의 성경적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살전 5:12-13; 갈6:6). 그러나 동시에 성경이 부여하고 있지 않는 권한을 목사에게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목사를 신성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 외에는 신성화되어야 할 분은 없다.
3. 그 뿐만 아니라 일부 교인들은 축도에 관해서 미신적인 생각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예배에 참석은 안 해도 목사의 축도는 받아야 한 주일 동안 아무 탈 없이 잘살 것 같아서 예배 끝날 무렵 뛰어 들어와서 축도를 받고 급히 교회당을 떠나는 교인들도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게 바른 신앙인가?
(강서침례교회에서 따온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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